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주 월성 (문단 편집) == 발굴과 [[복원]]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L20150821.010010720070001i2.jpg|width=100%]]}}} || || {{{#fbe673 '''월성 복원 상상도'''}}} || 월성 복원 상상도. 중심 건물인 조원전이 보인다. 앞에서도 언급됐지만 건물과 행각의 위치 등은 상상으로 만들어졌다. 지하 레이더 조사로 밝혀진 모습과는 상이한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는 저렇게 큰 건물들이 없었고 작은 건물들이 빽빽히 들어졌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신라왕궁대전복원.jpg|width=100%]]}}} || || {{{#fbe673 '''월성 대전 상상 복원도'''}}} || 중심 건물인 대전의 상상 복원도. 겹처마가 인상적이다. 그러나 지하 레이더 조사 결과 저 정도로 큰 건물이 발견되지 않았고 왕궁 중심 건물로 추정되는 건물이 가로 23미터, 세로 15미터밖에 안되는 건물이라 저렇게 웅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경주시 땅에 수많은 신라 관련 유적이 있지만 월성은 신라 국왕이 천 년 동안 살았고 정치의 중심이 되는 왕궁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일개 무덤이나 사찰터 정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귀중한 [[고고학]]적 비밀이 묻혔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당장 궁전의 일부였던 안압지에서 나온 발굴 결과를 보더라도 월성 발굴에 큰 기대를 걸 만했다. 그러나 1970년대 말 시험 발굴에 나섰다가 지하에 너무 많은 유물이 매장되어 당시 기술로는 도저히 발굴할 수 없다고 생각해 그대로 덮어버렸다고 한다. 당시 발굴팀장의 말에 따르면 발굴 기점을 잡고서 불과 10미터 길이밖에 파지 않았는데도 기와 더미가 줄줄이 나와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발굴을 중단했다고 한다. 이후 2000년대 들어 레이더 탐사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학술 조사를 시행하여 예상대로 놀라울 정도로 많은 유구가 잘 남았음을 확인했다. 각종 건축물의 유구가 초승달 모양인 월성 서쪽 끝부터 동쪽 끝까지 빼곡하게 들어찼고, 그 초석이나 기타 유물이 온전하게 묻혔다. 그러나 이런 결과가 알려지자 고고학계로서는 희망인 동시에 큰 과제가 되었다. 제대로 발굴하려면 20~30년은 걸린다고 할 만큼 거대한 규모이고, 그만큼 돈과 시간이 들 것이기 때문이다. 천 년 세월 동안 건물을 세웠다 허물었다를 반복했고 월성 지하에는 여러 시대의 흔적이 수직으로 겹쳐 섞여 발굴하기가 매우 까다롭다. 당장 좀만 더 걸어가면 경주 향교를 비롯한 [[경주 최씨|최부자 종가]]가 있고 또 당장 월성 북쪽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에 선덕여중이 있는 등 월성 주변은 변화를 많이 거쳤다. 또 최부자 종가 작은 사랑채 터에 남은 [[주춧돌]]이 월성에서 빼내온 주춧돌이다. 이처럼 당시 만든 석재는 이리저리 반출되었으니 발굴은 더 어려울 수밖에. 섣부르게 발굴하다가 오히려 유적을 훼손할지 모른다고 우려하는 시선이 대다수이다. 당장 [[무령왕릉]]에서도 워낙 졸속으로 발굴한 탓에 알아내지 못한 정보가 많았었다. 바로 옆 안압지 발굴도 예상하고 시작한 작업이 아니라서 과정이 비교적 부실했다. 뜬금없다면 뜬금없지만 월성 신라 왕궁을 '''원래 있던 그 자리에 [[복원]]해야 한다'''는 얘기가 간간이 흘러나오는 모양이다. 이유인 즉슨 경주를 찾는 사람들이 신라 궁궐이 어디 있고 어떻게 생겼냐고 물어볼 때 난처하다는 것과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군]]은 연간 600만 명 국내외 관광객 유치 목표로 6904억 원을 투입해 [[백제문화단지]]를 만들어 백제문화역사관, 사비 궁, 능사(왕국 내 사찰), 5층 목탑, 생활 문화 마을, 관광 [[리조트]] 등을 조성했으니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4828485|#]] 일본도 역사적 근거가 상당히 부족한 가운데 많은 부분을 상상에 근거해 [[헤이조궁]]을 복원해서 관광객을 유치하는 실정이다.[* 다만 헤이조궁은 대극전(大極殿) 복원에 필요한 자료가 어느 정도 있었다. [[헤이안 시대]] 말기에 [[고시라카와 덴노]]가 만들게 한『연중행사 에마키(年中行事絵巻)』라는 문헌에 고시라카와 덴노 당시의 '''대극전 모습이 그림으로 수록'''되었는데, 이 그림은 대극전 복원의 기본 자료로 쓰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일본이 [[헤이조쿄]]를 발굴하고 대극전 복원을 완료하기까지는 '''60년'''이 걸렸다. 현지에서는 "'''1300년을 기다렸는데 10년 정도 못 기다리겠냐'''"라는 반응이었다고.[[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8000.html|나라현의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한겨레21)]] 그러나 《연중행사 에마키》에 수록된 회화는 '헤이조쿄'와는 다른 '[[헤이안쿄]] 정전의 1층의 일부 기둥만 묘사한 수준이라, 전체적인 모습은 야쿠사지 등을 통해 추측해서 만들었다고 한다.[[http://dictionary.sanseido-publ.co.jp/wp/2015/07/18/絵巻で見る-『年中行事絵巻』巻七/|#]]] 어쨌든 왕궁인 월성과 경주 남쪽을 연결하는 주 통로로 사용된 대규모 교량인 [[월정교]]는 일단 복원이랍시고 만들어졌으나[[http://www.kyongbuk.co.kr/main/news/news_content.php?id=528194|#]], 역사적인 고증이 부족한 상태에서 만들어진 거라 많은 논란을 낳았다.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080604/8585985/1|#]] 그리고 고증 논란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월성 북쪽을 두르는 석축 [[해자]]도 2021년 기준으로 복원의 마무리 단계다. [[2025년]]까지 복원을 위해 국비 1890억 원, 지방비 810억 원 등 2700억 원을 투입한다. 우선 2017년까지 140억 원을 투입해 월성 발굴 조사 및 기초 학술 연구를 진행하고 궁궐 핵심의 복원에 착수한다. 경북도와 경주시는 발굴 조사 성과를 토대로 복원 가능한 유구(옛 물건) 등의 복원을 추진할 예정이다.[[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349&yy=2014|#]] 그리고 2014년 12월 12일 드디어 월성을 처음으로 제대로 발굴하여 조사를 시작했다.[[http://www.nocutnews.co.kr/news/4339890|#]] 일단 남아 있는 건축물의 흔적을 확인하여 복원까지 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한다. 다음과 같이 2023년까지 발굴을 진행할 계획이다. 1. 1단계(2014∼2018년/5개년): 월성 중앙부 시굴 조사와 정문으로 추정되는 북문지와 동문지, 남문지, 서문지를 발굴 조사 1. 2단계(2019∼2023년/5개년): 원지와 기타 유구 확인 지역을 발굴하며, 학술 대회 개최 및 발굴 종합 보고서를 발간 월성을 제대로 발굴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동안 성벽이나 해자 발굴만 진행했을 뿐 월성 내부는 손대지 않았다. 그래서 학계는 이번 발굴에 거는 기대가 크다. 월성 주변 발굴 현황은 다음과 같다. *1915년: 일본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가 처음으로 월성 주변 발굴 조사를 함. 월성 서쪽의 남쪽 성벽 일대 (골촉, 골침, 멧돼지 이빨, 사슴뿔, 동물 뼈, 탄화곡물, 토기편 등 발굴) *1979~1980년: 동문지 발굴 (정면 1칸, 측면 2칸 규모 문 터를 확인, 성벽의 대략적인 토층 상황과 석축 해자 유구를 확인) *1984~1985년: 성벽 바깥에서 해자 발굴 (해자의 규모와 성격을 파악, 해자가 기능을 상실한 후 통일신라 시대에는 건물을 지었다는 사실을 확인) *1985~2014년: 1~5호 해자와 계림 북편 건물터, 첨성대 남편 적심(積心) 건물지, 월성 북서편 건물지 등 확인 2007년 실시한 지하 레이더 탐사와 이후의 시굴 조사에서 많은 건물 터가 나타났다.[[https://t1.daumcdn.net/cfile/blog/27268544548A81F42D|#]] 3D 영상 복원도와는 굉장히 다른 모습이다. 2013년에 해자 근처 건물지 발굴 조사가 있었다.[[https://scienceon.kisti.re.kr/srch/selectPORSrchReport.do?cn=TRKO201400018782|#]] 2017년 5월 국내 최초로 월성 서쪽 성벽의 기초 층에서 50대 남녀 인골 2구가 발굴됐다. 학계에서는 성벽 아래층에 인위적으로 묻은 듯 보인다는 점을 근거로 [[인신공양]], 그중에서도 건물의 붕괴를 막고자 행하는 [[히토바시라|인주]]의 제물로 희생된 이들로 추측했다. 이전에도 인신공양인 듯한 흔적이 발견된 사례는 있었으나, 단순 사고 또는 범죄의 흔적이었을 가능성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었다. 이번 성벽 아래에서 발견된 인골은 정말로 인신공양의 흔적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서 의심하기가 어려운 첫 사례이다. 6세기 [[지증왕]] 시기까지 [[순장]]을 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인신공양 문화 자체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지만, 실제 사례가 나타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http://www.kyongbuk.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993564|#]] 2021년 9월 7일 20대 여자의 인골 1구가 추가로 발견됐다. 2017년 남녀 인골이 발견된 곳에서 불과 50cm 떨어진 자리였다. 인골 주위에서 말, 소, 사슴 따위의 늑골과 토기가 함께 출토되었고 인골들이 모두 성벽 중심 골조를 따라 규칙적으로 나란히 발견되었기 때문에 성벽 축조 당시 인신공양 제사를 행했다고 추정했다. 또한 조사 결과 삼국사기에 기록된 101년이 아닌 '''4세기 중반부터 축성되어 5세기 초반에 완공되었다'''고 드러났다. [[흘해 이사금]]에서 [[내물 마립간]] 시기이다. 2022년 2월 9일 복원 사업에 탄력이 붙었다. 월성 전체를 복원하는 건 확정인 듯하다.[[https://www.gyeongju.go.kr/news/page.do?pageNo=2&pagePrvNxt=1&pageRef=0&pageOrder=0&step=258&parm_bod_uid=230392&srchEnable=1&srchKeyword=&srchSDate=&srchBgpUid=-1&mnu_uid=2254&parm_mnu_uid=0&srchEDate=&srchColumn=&srchVoteType=-1&|#]] 2022년 3월 31일 신라 왕궁인 경북 경주 월성을 둘러싼 방어 시설 [[해자]](垓子) 복원·정비 작업이 마무리됐다.[[https://www.yna.co.kr/view/AKR20220331167800053|#]] 2022년 12월, 신라 왕궁 월성과 당시 도심을 남북으로 연결하는 큰 도로가 확인되었다.[[https://m.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212211805001#c2b|#]]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